나무가 비에 젖는 날...
그리움이, 사랑이 찬란하다면
나는 지금 그 빛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파서 못 견디는 그 병은
약이 없는 병이어서
병 중에 제일 몹쓸 병이더이다
그 병으로 내 길에
해가 떴다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지고
봅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돌아흐르며
내 병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리그 병이 깊어져도
그대에게 이르지 못할 병이라면
이제 나는 차라리 그 병으로
내가 죽어져서
아,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 곁에 흐르고 싶어요.
김용택 / 약이 없는 병
나무가 비에 젖는 날은
바람도 비에 젖는다
가지를 흔들며
날선 자괴에 빠져 등줄기에
채찍을 드는 나무 곁에서
바람은 울기만 한다
나무가
가지마다 꽃을 피워 빛으로 일어서던 날
어둠은 깊은 그림자로 끝없는 아픔을
암담한 내일 위에 걸어 놓고
꽃잎을 꺽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지는 꽃잎
사랑이 강물 위에 떨어졌다
끝내 빛은 어둠의 뒷골목에 누워
전신이 부셔져 자취도 없어지고
작은 열매도 세우지 못한 가지는
옹이진 상처를 안고
겨울 뜰에 나와 섰다
빈 가지의
나무가 몸부림치며 젖고 있다
떨어진 꽃잎이 저만치 흐른다
주르륵
시간의 끝으로 흘러가는 꽃잎
바람이 나무의 집 밖에서 운다.
지연희 / 나무가 비에 젖는 날
어느 날 예고 없이 두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온통 캄캄한 암흑만
시야에 가득해진다 하여도
나는 그대를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눈은
가슴 속에 있는 것
보이지 않는 마음의 눈으로 나는 그대를
언제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아름다운 그대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의 필름에 저장시킵니다
설령 두 눈이 멀어도
설령 정신이 혼미해져도
그대를 볼 수 있도록
나는 두 눈이 멀어도
사랑하는 그대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장세희 / 두 눈이 멀어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