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란...세엣

이름 없는 여인 되어....

내사랑장미 2008. 6. 15. 01:10
 [시가 있는 아침(중앙일보 2008.06.02)에서] 

노천명. 문화부 기자로, 대학 강사로 화려한 길을 걸은 그녀는
나혜석·모윤숙 등과 함께 1930년대 대표적 여성 시인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인텔리 여성의 화려함 속에는 연애의 실패,
현실과의 불화, 허약한 육체 등이 도사리고 있어 급기야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녀의 시는
섬세한 언어로 고독과 비극의 생을 진실하게 그림으로써
한국 여성시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었던 그녀는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그녀가 꿈꾸는 낙원은 박넝쿨과 오이와 호박이 있고
들장미와 욕심껏 들여놓은 하늘과 반짝이는
별이 있는 조그만 산골이다.
생의 연속적 질서를 이루어 주고 무욕과 자족의 공간으로
상처받은 운명을 위무하는 산골은 심리적 보상처가 틀림없을 터.
이름 없는 여인이지만 여왕보다 더
행복한 낙원 꿈꾸기로서의 생생한 구경(究竟).
 [ 박주택·시인 ]



이름 없는 여인 되어 / 노천명(1911 - 57)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엔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심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띄여 놓고
밤이면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